흔히 사람들이 말하기를, 영화는 가상의 현실(pseudo-reality)을 창조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이 '객관적인 현실'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다.

미디어의 이미지에 의한 간접 경험이 일상의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된 현재, "가상의 현실"과 "현실 그 자체"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되어버렸다. 미디어는 우리의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부터 경험을 이끌어내고 우리의 발이 닿지 않는 곳으로부터 인식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디어는 "가상현실"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를 창조한다.

그렇지 않다면 영화 "죠스" 이후 사람들이 상어에 갖게 된 막연한 공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며, 사람들이 이 공포 속에서 쏘아댄 작살과 총으로 죽어간 무참히 죽어간 상어떼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상어는 위협당하지 않는 한 사람을 공격하지 않으며, 사람이 상어에 물릴 확률보다 벌에 쏘여 죽을 확률이 더 높다는 통계적 사실은 거대한 입을 벌린 <죠스>의 포스터 앞에는 무기력하게 힘을 잃었다.

미디어가 창조한 이미지의 현실 속에서 죽어간 것은 한낱 상어만이 아니었다. 이것은 주권 국가의 수도 상공에서 폭탄을 쏟아붓는 '대외정책'의 결정 과정에도 한 몫을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 번도 바그다드를 가보지 않은 대다수의 미 행정부 관료들에게 그 곳의 "현실"을 제공했던 것은 미디어였다.
아마도 그들이 아는 '아랍' 세계란 가깝게는 성조기에 불을 붙이며 환호하는 이라크인들을 담은 <타임>지 표지로부터 공중에 총을 쏘아대는 민병대의 모습을 담은 씨앤앤(CNN)의 뉴스 클립, 그리고 멀리는 그들이 연애시절 보았던 <아라비아의 로렌스>부터 아이들을 안고 보았던 디즈니의 <알라딘>에 등장하는 야만인들이 전부였을 것이다.

에드워드 사이드에 따르면, 문학, 예술, 지리학, 역사학부터 생물학, 의학에 이르기까지 '오리엔탈리즘'의 원천을 제공한 서구의 방대한 지식체계의 영역은 이제 할리우드 영화와 디즈니 애니메이션까지 확대되었다. 타자를 규정하는 시선이 냉혹한 식민통치자의 눈으로부터 미키의 순진한 눈망울로 옮겨간 것이다.

이제 디즈니가 제공하는 현실 속에서 남자아이들은 자신과 피부색이 다른 친구들을 치와와 혹은 하이에나와 동일시 하는 법을 배우고, 여자 아이들은 자신을 학대하는 남자친구를 인내함으로써 멋진 왕자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물고기가 나오는 만화영화 한 편을 보러가면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심장 박동을 높이는"(Pixar)"라는 이름 앞에 붙은 "디즈니"라는 낡은 상표. 비록 제휴관계에 있지만, 두 회사의 애니메이션 사이에는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된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이 외부지향적이라면, 픽사의 애니메이션은 내부지향적이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은 고대희랍부터 우주개척시대까지, 그리고 아트란티스 대륙에서부터 위진남북조시대 중국까지 종횡무진 뛰어다닌다는 점에서 식민지 개척시대의 낡은 전통을 보는 듯하다.

반면에 픽사의 애니메이션은 밖을 향하기보다는 안을 지향한다. 그들은 장난감의 꿈에, 벌레의 애환에, 그리고 동심의 공포에 섬세한 확대경을 들이댄다. 차갑던 모니터 픽셀은 픽사의 손을 거쳐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따뜻한 벽돌로 다시 태어났다.
픽사는 테크닉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안다. <픽사>는 세계 최고의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현란한 시각효과를 이야기 앞에 내세우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그들은 시각효과가 영화의 부수적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드문 스튜디오다. 픽사의 최근작인 <니모를 찾아서>를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가장 정교한 기술이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

픽사의 <벅스 라이프> 팀은 제작에 착수하기 전, 확대경으로 자연의 세계를 면밀히 관찰했다. 그 결과 얻은 소득 가운데 하나는 나뭇잎과 풀잎이 반투명하게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이 팀은 차기 프로젝트인 <니모를 찾아서>를 다시 맡게 되면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해 내는데, 그것은 바닷물 역시 반투명하다는 사실이다.

<니모를 찾아서>가 그리는 바닷속은 극히 사실적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실적"이라는 것은 실사를 그대로 흉내냈다기보다는 물속의 생태와 빛의 흐름을 놀랄만큼 섬세하게 관찰했다는 의미다. 비록 바닷속의 생물과 수중현상은 과장되고 희화화되었지만, 이러한 묘사 역시 사실의 정교한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니모>의 바닷속에는 끊임없이 플랑크톤 부유물의 눈이 내리고, 파도가 일렁일때마다 물위의 태양은 해저에 변화무쌍한 오로라를 그려낸다. 캐릭터들이 실제 물 속에서 보는 것 처럼 뿌옇게 처리된 것은 물론, 수중에서의 거리 차이는 크기 변화뿐만 아니라 색상의 차이를 낳는다는 점까지도 고려되었다.

수중세계의 사실적인 묘사를 위해 픽사의 애니메이터들은 하와이 바닷속을 수시로 드나들며 수중생물들의 생태를 연구했으며, 해양학자들과 해양생물학자들을 초청해서 해당 분야의 강
의를 듣기도 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분만실'에서 아기가 태어나기를 바라는 어릿광대 고기 부부가 있다. 이들은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400개의 알 앞에서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다. 근심 많은 남편 말린(Marlin)이 아내 코럴(Coral)에게 묻는다. "저 애들이 나를 사랑할까?" 코럴이 답한다. "확률이라는 게 있는데, 최소한 저애들 중에서 하나 정도는 좋아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비극이 닥쳐, 그 말은 아내의 마지막 말이 되고, 아이는 하나만 남게 된다.

옆지느러미 한 쌍이 짝짝으로 태어난 니모(Nemo)는 아버지의 사랑 속에서 자란다. 니모가 처음 학교에 가는 날. 아버지 말린은 애지중지 키워온 아들을 학교에 맡기는 것조차 두렵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사사 건건 간섭하는 아버지의 과보호가 부끄러워진는 아버지에게 "
난 아빠가 싫어"라고 말하며 반항하기 시작한다.

니모는 말리는 아버지를 뿌리치고, 겁없이 그 위험한 인간의 배로 다가간다. 담 큰 친구들도 두려워하는 "배 밑바닥 만지고 오기"에 도전한 것이다. 그러나 니모는 돌아오는 길에 인간의 손에 잡히게 되고, 저 멀리 시드니의 치과 어항 속에 갖히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리고 아버지 말린은 우연히 만난 블루탕 도리(Dory)와 함께 니모를 찾아 나선다. 문제는 니모를 잡아가는 배를 목격했다는 도리가 건망증이 아주 심하다는 것. 도리는 가엾게도 단기기억 상실증에 시달리고 있다.

뭐 이런 식이다. 자기만 믿고 따라오라며 말린의 길을 안내하던 도리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말한다. "왜 자꾸 나를 따라오는 거야?" 이건 약과다. 상어에 쫓기다 간신히 문을 닫고 위기를 모면하고 나서, 문을 부수고 들어오려는 상어를 향해서 말한다. "누구세요?"

도리의 캐릭터가 어떤 영화를 패러디한 것인지는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패러디의 목록에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새>와 앨런 파커의 <미드나잇 익스프레스>까지 포함되어 있다. 특히 히치콕의 그 유명한 <사이코> 음악이 얼마나 (공포가 아니라 웃음을 유발하기 위해)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는지 주목하기 바란다.

어항으로부터 '탈옥'을 계획하는 물고기 모습에 이르게 되면, 관객들 머리 속에는 제작팀의 기획회의 장면이 선하게 떠오를 것이다. 만일 내가 물고기라면 어떻게 어항에서 빠져나와 바다로 돌아가겠느냐는 주제를 놓고 머리를 짜는 모습 말이다. 제작팀의 이런 치밀함이 고래수염으로부터 치과의사의 호주 억양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배어있다.
그러나 <니모를 찾아서>를 걸작으로 만든 것은 섬세한 눈과 번뜩이는 재치만이 아니다. 이 영화에는 상처받은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마음과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모든 물고기들을 개성있는 주연으로 만든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배려가 상어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꾸고, 니모를 좌우 지느러미 크기가 다른 '장애인'으로 그려내는 데 이르러서는 이것이 단순히 웃고 말 영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니모를 찾아서>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그들과 어울려 살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웬만한 낚시광이라도 몇 주간의 출조계획을 취소할 것이다. 이 영화가 말하고 있지 않은가. "물고기는 음식이 아니라 친구"라고. 그러나 다양성이 인정되지 않는 우리 사회에서는 이야기가 좀 다르다. 물고기는 사람의 친구가 아니라 스승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