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 오데 이리 좋은 데가 있노..."

해와 바다를 가득 품은 곳, 금오산 향일암

 ▲ 향일암에서 바라다본 바다. 하늘과 수평선이 맞닿아 있다

1. 향일암 가는길

"맻 번 찬가 봐주소, 학생."

총각도 아니고 학생?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듣기 좋은 호칭이다. 여성들은 아가씨, 아줌마라는 구별된 명칭이 있건만, 남성들은 나이가 젊으니 늙으나 아저씨로 통한다. 물론 어쩌다 운이 좋으면 총각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학생'이라니. 웃음이 났다.

6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할머니는 버스 번호를 봐달라는 부탁을 하셨다. 내심 할머니 눈이 어두운 것을 감사히(?) 여기며 지나가는 버스번호를 가르쳐 드렸다. 10여분이 지나도 차가 오지 않자 할머니는 가방속에서 수첩과 메모지를 들고 노선번호를 일일히 적기 시작했다.

할머니와는 20여분 정도 같이 있다가 당신이 먼저 출발하셨다. 30분, 40분이 지나도 버스는 오지 않는다. 시간당 한 대 정도 있으니 아마 내가 정류장에 막 도착했을 때 이미 버스가 통과한 것 같았다. 결국 한 시간을 꼬박 기다리고 나서야 향일암행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장날이라서 그런지 도로 주변은 상인들로 가득찼다. 이윽고 양손에 한보따리씩 짐을 들고 어르신들이 줄줄이 버스를 타기 시작한다. 뽀글뽀글한 파마머리, 펑버짐한 몸빼차림, 오랜 세월 동안 햇볕을 보았는지 얼굴에 그을음이 가득하다. 돌산으로 들어서니 '갓김치 팝니다. 전국 배송 가능' 간판이 길거리 곳곳마다 보인다.

돌산 대교를 지나 구불구불 길을 따라 버스는 목적지까지 한발자욱씩 가고 있다. 창문을 활짝 열어보니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바다 바람이 몰려온다. 할 수 없이 중간중간 조금씩 열 수밖에.

2. 해를 향한 암자

주차장에서 향일암까지는 걸어서 보통 10분에서 15분 정도 소요된다.
그러나 올라가는 길은 경사가 무척 가파르다. 중간에 한번씩 쉬면서 천천히 가야지 목적지까지 여유롭게 도착할 수 있다. 무심코 촌놈 마라톤 뛰듯이 단숨에 가려고 하거나 술 한잔 걸치고 올라갔다가는 큰 코 다치기 십상이다.

"갓김치 맛보고 가씨요. 내려올때 사가꼬 가씨요."

관광객들은 김치 한조각을 입에 넣고는 암자를 향해 출발한다. 중간쯤 가다가 경북 안동에서 온 단체 관광객들을 만났다.

"무슨 길이 또 있노."

절반 정도 올라가다가 수십미터 길이의 오르막 계단이 보이자 다소 힘이 드는 모양이다. 나 또한 운동 부족인지 가뿐 숨을 크게 몰아쉰다. 이마와 등언저리에 땀이 묻어나온다.

"인자 다 왔니껴?"
"쪼매만 더 가믄 된다."

그들의 대화를 뒤로 하면서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이야! 오데 이리 좋은 데가 있노. 여기 사는 사람들 복받았네..."

방금까지 숨을 허덕이던 아줌마들의 감탄사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다. 이 광경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 있는 수평선, 고깃배 한두 척이 그려놓은 물길, 절을 감싸고 있는 온갖 기암괴석, 바위틈 곳곳에서 불어오는 신선한 바람들... 관음전, 대웅전에 계시는 스님들의 기도에 방해가 될 정도로 사람들의 감탄사는 연신 계속됐다.

"원효대사님! 이 아름다운 자연의 유혹을 버리고 어떻게 수도생활에 정진하셨는지요."

원효대사가 수행했던 관음전에서 본 자연의 조화는 사람을 한없이 취하게 만들었다. 주변에서는 셔터를 누르는 소리와 함께 절과 바다를 배경삼아 한껏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약간의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난간에 바짝 다가서는 것이 조금 곤혹스러웠지만 한걸음씩 떼면서 난간 너머 바닷 내음을 깊이 들이마셨다. 곳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반바지와 샌들차림이 다소 서늘하게 느껴진다.

향일암(向日庵)이란 '해를 향하는 암자'라는 뜻이다. 이곳은 바다와 바위, 그리고 수평선 너머 불끈 솟아오르는 태양이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다. 인간은 암자 외에 더 이상 개입할 곳은 없어 보인다.

원효대사는 어떻게 이곳을 알고 절을 지었을까? 우연일까. 신앙의 힘이었을까. 아마도 분명 부처님의 계시와 스님의 깊은 도량으로 가능했을 것이다. 신라시대의 교통 사정을 감안한다면 고개가 절로 흔들어진다. 절이 완공되기까지는 인간의 노력 외에 그 무엇이 반드시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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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동주와 갓김치

내려오는 길 위에 동동주를 파는 가게를 지났다.

"동동주 먹고 가씨요. 갓김치 배달해줍니다."

이 향긋한 유혹의 내음을 어찌 그냥 지나칠수가 있겠는가?

"한잔에 얼마입니까?"
"천원이요."

둥둥 떠 있는 쌀알을 씹을 여유도 없이 한 모금 꿀꺽 떠넘긴다.

그리고 방금 담근 불그스레한 갓김치 한 조각을 걸친다. 사각사각 씹히는 맛이 일품이다. 눈으로만 보고 있어도 맛있을 만큼 김치 양념이 푸짐하다. 두어조각을 더 걸치고 막걸리 한 모금을 또 들이킨다.

"이거 디지털 카메라다요?"
"예."
"우리 가게 간판하고 전화번호랑 찍어서 인터넷에 좀 올려주씨요."

주인 아저씨는 웃으면서 부탁을 하셨다. 아주머니가 "인터넷에 함부로 올리면 안될틴디..."하시자, "개인 홈페이지는 괜찮당께..."하신다. 아저씨, 아주머니의 대화를 듣고 웃으면서 김치를 가득 입에 넣고 한잔을 더 부탁했다. 솥에 물 붓듯이 시원스럽게 잘 넘어간다.

"주차장까지 배달해줄랑께 갓김치 사씨요. 맛 한번 보고 가씨요."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려는 그들의 목소리는 끊임이 없었다.

4. 돌아오는 길

다행히 돌아오는 길은 그다지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요짝으로 앉아야 바다가 잘 보인다고..."

어떤 분이 외지 아가씨들에게 친절히 자리도 안내해준다. 나도 슬그머니 자리를 오른쪽으로 옮겼다. 창문너머로 보이는 바다와 하늘, 그리고 새털구름. 중간중간에 갯벌도 보인다.

구비구비 길을 지나 어느새 여수 시내 중심을 관통했다. 밤부터 주말까지 비가 온다고 한다. 올해는 유난히 큰 비가 많이 오고 있다. 조금만 늦추었어도 이 기쁨을 못누릴 뻔했다.

향일암 사진을 보면서 어머니는 한번도 못가봤다고 하셨다. 이렇게 가슴이 뜨끔할 수가. 오늘 일만 없었더라도 함께 갔을 거라며 무척 아쉬워하셨다. 다음에는 꼭 모시고 가서 바다 내음을 함께 맡아야겠다. 동동주와 갓김치의 뒷 맛이 아직 입안 가득히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