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요? 모르지 뭐. 거기서 과일 파는 아주머니가 어디 한 두명 이어야지. (자주 바뀌니까) 우리야 누가 누군지 알 수 있나."

접시에 어묵 국물을 담아주던 김아무개(53)씨는 기자의 질문에 별 관심 없다는 듯 대답했다. 당시에 찍었던 사진까지 보여줬지만 고개를 절래 흔든다.

지난 3월 17일 오후 4시께, 서울 중구 남대문 시장 5번 출구 근처에서 기자가 서성거렸던 이유는 1년전에 인터뷰했던 정씨 아주머니를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루종일 쪼그려 앉아 사과, 귤 등을 팔아도 3만원 이상 매상을 올려본 적이 오래다고 하소연 했던 그였다.

2001년 12월 29일, <오마이뉴스>는 서울 중구 남대문시장을 찾은 적이 있다. 외환위기 이후 더욱 벌어진 계층간 소득격차를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기자는 정씨 아주머니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와 같이 노상 좌판 등을 하며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는 서민 계층의 힘겨움은 1년여가 지나도록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오이, 쑥갓 등을 펼쳐놓고 장사를 하는 김점례(65·경기도 군포) 할머니는 기자에게 손짓하며 "이거 들여가. 금방 따온 것들이여, 싸게 해줄께"라고 붙든다. 하루 얼마나 버시냐는 질문에 "그런걸 왜 물어. 이거 팔아서 돈을 벌긴, 그냥 용돈하려고 나온 게지"라고 답한다. 나중에 하루 1만원도 못 벌고 집에 돌아갈 때가 많다고 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외국인이 서울에 오면 한번씩은 꼭 둘러보게 된다는 남대문시장은 해를 거듭할수록 내리막길이 뚜렷하다. 문을 닫거나, 가게를 내놓은 상점도 매년 늘고 있다. 시장을 찾는 사람들도 평일 오후시간대는 한산하다 못해 썰렁하기 그지없다.

ㄱ 남성복 매장을 꾸리고 있는 김상천(48, 서울 영등포)씨는 "하루에 소매로 남자 바지 3장이상을 팔기도 어렵다"면서 "1년전에도 비슷했지만 요즘은 아예 사람들이 시장에 나오지도 않고, 지방에서 올라오는 사람들도 줄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방상인들이 안 올라온다

18일 새벽 1시께. 남대문시장 주변 도로는 전국 각 지방의 의류 조합 상인들이 타고 온 관광 버스와 승합차 등으로 가득 메워져 있다. 겉으로 보기에도 낮시간보다 시장의 활력을 느낄수 있다. 하지만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거보다 사정이 나아지지 않은 점이 두드러진다.

7번 출구쪽 유료주차장에서 일하는 최아무개(28)씨는 "예전에 말 들어보면, 이건 올라온 것도 아니에요. 양쪽으로 차들이 빼곡이 들어차고, 우리에게도 버스가 많이 들어오기도 했는데요. 뭘"이라고 말했다. 주차장에 주차돼 있는 차는 자가용 단 2대였다.

울산의류조합 상인들을 데리고 올라왔다는 이아무개(33)씨는 "2-3년만해도 매일 버스 4대씩 100명이 넘게 상인들이 올라와 물건을 사가지고 갔었다"면서 "오늘은 2대가 올라왔는데 상인들 합해봤자 40명이 채 안된다"고 전했다.

그는 "지난 하반기부터 경기가 더 안좋아지더니 갈수록 안 좋아지고 있는 것 같다"면서 "울산의 경우 예전부터 공단 등으로 소비가 높아 다른 곳보다 서울에 자주 올라오고 했었는데, 울산이 이정도면 다른 곳은 더 심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울산조합의 경우 매일 올라오던 것도 최근에는 2-3일 단위로 올라오며, 상인들의 씀씀이도 전보다 크게 줄었다.

E 지하상가에서 숙녀 악세사리를 취급하는 정성일(48)씨는 "지방 도매상인들이 좀처럼 지갑을 열지 않는다"면서 "전에는 숙녀 벨트를 사가면서 세트로 다른 악세사리 2, 3종 정도를 함께 사갔는데, 요즘 이같은 경우는 거의 드물다"고 말했다. 대부분 일반 소매 소비자처럼 낱개로 물건을 사간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대구의류조합의 김아무개(27, 여)씨는 "웬만하면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경우도 많고, 장사도 잘 안되니까 아무래도 서울까지 올라올 일이 별로 없는것 같다"면서 "아무래도 전보다 수입이 줄어들다 보니 물건도 적게 가져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덩달아 이씨처럼 상인들의 물건을 운반해주고, 보조해주는 사람들은 자신의 하루 수입도 40%이상 줄어들었다. 아직 미혼인 이씨는 현재의 수입으로는 결혼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며 다시 담배를 물었다.

"채소가격은 짱짱한데, 소매상인이 줄어드니…"

주요 생필품 가운데 하나인 농산물 시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 3월 17일 저녁 6시, 서울 송파구 가락동의 농수산물 시장이 분주해지기 시작한다. 경매의 시작을 알리는 채소류 경매가 6시 30분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상추, 쑥갓 등 각종 채소를 실은 10톤짜리 대형 트럭 위로 노동자들의 손놀림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후, 경매사가 경매가격을 볼 수 있는 기계에 올라가, 가격을 부르면서 본격적인 흥정이 시작된다. 각 청과물 시장에서 나온 상인들은 20미터 가까이 늘어선 상추 상자를 열고, 제품의 질을 확인하고는 가격을 찍어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상추, 칡, 쑥갓, 시금치, 아욱 등 봄 냄새가 물씬나는 각종 채소에 정신없이 가격이 매겨졌다.

흥정가격을 열심히 기계로 찍고 있던 김아무개(40)씨. 그는 요즘 가락시장의 경기를 이렇게 표현했다.

"채소 가격은 짱짱합니다. 시장에서 물건 사보시면 아실 텐데. 웬만한 채소들 가격이 꽤 나가는 편입니다. 작년 이맘때와 비교해도 나쁘지 않아요. 그런데 최근 가락동 시장을 찾는 소매상인들이 많이 줄고 있다는 거예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동네 시장 손님이 많이 줄었다고 하던데… 가락동도 그 여파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상점 폐업하고, 철수하고…대형 쇼핑몰도 손님 없긴 마찬가지

최근 몇 년새 남대문 재래시장의 경쟁력을 높이는 차원에서 메사, 코코 등 최신식 대형 쇼핑몰이 잇달아 들어섰다. 젊은 소비계층의 확대와 함께 지방 도매상인들의 다양한 상품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지어졌지만 아직까지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18일 새벽 2시 대형 의류쇼핑몰 메사(Mesa) 4층 남성의류, 악세사리 매장. 군데 군데 빈자리가 눈에 띄었다. 일부 매장은 '5일간 영업금지' 팻말이 주인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메사 초창기때부터 분양받아 들어왔다는 최아무개(43)씨는 "장사가 안되다 보니까 일부 매장이 규정을 어기면서 (장사)하다가 걸려서 영업금지 당한 것"이라며 "2년전 분양받아 들어올 때 만해도 한때 이시간이면 지방 도매상인까지 해서 꽤 북적거렸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3층 숙녀의류 매장도 4층과 거의 비슷했다. 5층 악세사리, 가방, 구두 매장은 거의 대부분의 매장이 문을 닫았거나, 철수한 상태였다.

가죽 전문 매장을 하고있는 정아무개(37·여)씨는 "임대료와 인건비 등을 감당할 수 없어 매장을 뺀 사람들이 늘고 있다"면서 "소매 손님들의 경우 발길이 거의 끊겼고, 가끔 일본 관광객이나 일부 도매손님이 찾을 뿐 장사가 너무 안된다"고 토로했다.

지난해 새롭게 문을 연 악세사리 전문 쇼핑몰 '코코'(CoCo) 역시 손님이 없기는 마찬가지. 18일 밤 12시30분께, 1층 10여개 악세사리 매장에서 물건을 고르는 도, 소매 손님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가끔 한 두명의 젊은 고객이 매장을 둘러볼 뿐 물건을 직접 사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새벽 2시30분께, ㄷ 상가의 지하수입 매장은 일부 매장만 남겨놓고 거의 모든 매장이 철수한 상태였다. 조그만 통로 사이로 간이의자들과 상가 호수를 표시한 조그만 팻말만이 이곳이 상가였다는 것을 짐작케 해준다.

다시 가락동 농산물 시장. ㄷ청과 모자를 쓰고 열무와 시금치를 바닥에 내려놓는 일을 하고 있는 임아무개(55)씨. 그의 손에는 S자 모양의 갈퀴가 쥐어져 있었다. 그의 손과 갈퀴는 순식간에 커다란 짐을 옮겨 놓곤 했다. 열무를 실은 트럭 한대가 들어오자 짐을 내리는 그의 손길은 더욱 빨라졌다.

18년째 이곳에서 짐꾼 일을 하고 있다는 임씨도 "경기가 안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크게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가락동으로 들어오는 물량에 따라 수입이 정해지는 일이라 걱정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 채소 값이 좋은 편이잖아. 그런데 경기가 안 좋아지고 있다니까 또 모르지, 어떻게 될지…" 말끝이 흐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