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12시 30분.
야광 안전띠, 모자, 야광 각반, 목장갑, 후레쉬.

지하철 태릉입구역 토목 노동자 이정길(48세)씨는 선로점검에 투입될 때 필요한 장비들을 꼼꼼히 챙겼다. 만일의 상황에서 자신의 안전을 지켜줄 일종의 '보험'이다.

이씨는 대부분의 승객이 취객으로 이루어진 장암행 7호선 마지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연장운행으로 1시간이 늦어진 막차는 어느새 술냄새가 배어 있다.

자신의 담당구역인 용마산역에 하차한 이씨는 지하철 운행이 완전히 중단되고 선로에 전기공급이 끊기는(단전) 새벽 1시 30분까지 기다린다. 이윽고 휴대폰을 통해 단전을 확인한 그는 역 맨 끝에 설치된 조그마한 철제 계단을 통해 거대한 용의 뱃속 같은 지하철 선로로 들어섰다.

용마산에서 태릉입구역까지는 5.2Km. 3시간을 도보로 점검하는 동안 그는 도시철도공사 7년차 베테랑답게 자신이 맡은 업무와 점검사항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그 와중에도 그는 틈틈이 동행한 기자에게 지하철 연장운행 후 가중된 업무로 인한 지하철 노동자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지하철 연장운행 이후 노동강도 가중

"이전에는 밤 11시 30분에 지하철 운행이 중단되고 12시 30분이면 단전이 돼 그때부터 새벽 4시 30정도까지 4시간 정도 선로 내 작업을 했어요. 하지만 연장근무 이후에는 선로 내에서 작업을 할 수 있는 시간이 3시간 정도로 줄었죠. 인력은 그대로인데 작업이 가능한 시간은 줄었으니 노동강도가 세진 것은 당연하죠."

▲ 지하철 선로내 점검작업을 하고 있는 지하철 노동자 
 
새벽 5시에 선로에 다시 전기가 공급(급전)되기 때문에 새벽 4시 30분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선로를 비워둬야 한다.

"시간이 촉박하다 보니 이전에 비해서 열심히 한다고 해도 예정된 작업을 마치지 못하고 선로에서 철수를 해야 하는 경우도 많아졌어요. 대구지하철 참사 이후 안전, 안전하는데 말뿐이지 안전대책은 나아진게 없어요."

업무는 많아지고 피로는 누적되는 가운데 연장운행하는 마지막 열차가 취객으로만 차 있을 때는 더욱 허탈해진다.

선로점검을 하는 동안 내비친 연장운행 후 악화된 노동환경과 시민의 안전을 도외시하는 도시철도공사의 정책에 대한 불만이 이씨 혼자만의 푸념은 아니다.

26일 저녁에서 27일 새벽까지 현장에서 만난 지하철 노동자들은 시민편의를 내세워 서울시와 공사측이 무리하게 추진한 연장운행에 대해 거센 불만의 소리를 쏟아냈다.

연신내역에 근무하는 설비노동자 기홍석씨(36세)는 "연장운행으로 근무환경이 악화된 가운데 대구참사가 겹치면서 근 20일간은 비번인 날에도 제대로 집에 들어가 쉬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동료들 중에는 계속된 과로로 근무지에서 쪼그리고 조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일하다 코피를 터트리는 친구들도 있어요"라며 어려움을 호소했다.

연장운행으로 인한 업무의 과중은 역무원이나 승무원들에 특히 심하다.

왕십리역에서 역무 업무를 맡고 있는 정수복(35세)씨는 1시간 연장운행이 단지 1시간의 업무 증가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연장운행된 후 승객의 대부분은 술취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다보니 열차에 오바이트하는 사람, 술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이 많고 이런 손님들을 상대해야 하다보니 역무원들의 스트레스는 훨씬 커지고 뒷정리하는 일도 힘들어졌어요.

예전에는 11시 30분 정도에 열차운행이 끝나면 1시간 정도 마무리하고 3시간 정도 눈을 붙이고 첫차 운행 준비를 했는데 지금은 잠시 눈 붙이는 것도 어려워요."

기관사 피로 쌓여 운행중 졸기도

27일 새벽 4시 40분. 기자는 7호선 한 지하철 역에서 첫차 운행을 준비하는 기관사를 만날 수 있었다. 통상 기관사들은 막차 운행을 마치고 3∼4시간 정도 휴게시간을 이용해 수면을 취한 후 새벽 첫차 운행을 시작했다. 하지만 연장운행 이후에는 그 잠깐의 수면도 여의치 않다.

전날 운행을 마치고 새벽 2시경에나 잠시 눈을 붙일 수 있었다는 그는 기관사 휴게실에서 방금 일어나 피곤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세면도 못한 채 근무복을 갖춰입고 운행을 준비해야 했던 그는 "기관사가 운행중에 조는 경우도 있다는데?"라는 질문에 "한두 시간 겨우 자고 운행을 재개해야 하는 상황에서 졸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라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는 "기관사들이 과도한 운행으로 인해 피로가 쌓여 있는 상태에서 승객들의 안전을 신경쓸 여력이 없어요. 정부나 공사측이 진심으로 시민들의 편의와 안전을 생각한다면 연장운행에 앞서 최소한의 인력충원이 이루어져야 합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대구참사를 지켜보면서 승무원으로서 죄인된 심정입니다"라고 밝히며, "하지만 참사의 원인을 승무원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봅니다. 1인 승무원 체제에서 운행 중 객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알 수 없고, 화재 후 단 10분만에 지하철 전체가 불덩이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고, 누구한테도 들어본 적도 없었어요"라고 안타까운 마음을 표시했다.

신원은 밝히지 말아줄 것을 신신당부한 그는 "시민편의를 위해 연장운행을 하는 것은 반대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인력보충이 전제돼야 합니다"라고 연신 말하며 "연장운행을 하려면 막차가 아닌 첫차 시간을 앞당겨야 한다고 봐요. 취객이 대부분인 막차의 연장운행보다는 일용직 노동자나 생계를 위해 일찍 나서는 시민들을 위해 첫차 시간을 앞당기는 것이 정말 시민편의를 위한 것 아닌가요?"라고 개인적인 생각을 밝히기도 했다.

대부분의 지하철 노동자들은 연장운행으로 고충을 토로하면서도 연장운행 자체를 반대하지 않고 있다. 다만 연장운행에 따른 인력보충과 안전대책 강구가 전제가 되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는 노조의 입장이기도 하다.

서울도시철도노조 기술지부장을 맡고 있는 전호석씨는 "서울시와 공사가 준비되지 않은 연장운행을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시민의 안전과 노동자의 근로조건은 뒷전으로 미루고 있습니다. 노조는 지하철의 정상적인 운행을 위해서는 807명의 인력충원이 필요하다고 요구해 왔습니다. 파업까지 불사한 끝에 협상을 통해 137명의 충원을 공사로부터 약속받았지만 이마저도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실정입니다"라며 공사측의 대책을 비난하며 안전운행을 필요한 최소한의 인력 확보를 주장했다.

지하철 노동자들은 연장운행으로 인해 과도한 노동과 피로감에 시달리면서도 안전운행을 위한 그들의 요구가 시민들에게는 철밥통 공무원들의 집단이기주의로 비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다.

대구참사, 지하철 노동자는 '가해자이자 피해자'

전호석씨는 "대구참사 이후 지하철에 대한 시민들의 반감이 거세지면서 정당한 요구를 하는 것도 조심스럽습니다. 이번 사고에 있어서 우리는 가해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피해자이기도 합니다"라며 답답한 심경을 밝혔다. 취재하는 동안 만난 대다수의 지하철 노동자의 말에서 같은 심정을 읽을 수 있었다.

▲ 대구참사 이후 노조는 안전대책강구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첫차가 운행되는 새벽 5시 30분이 가까워질 무렵. 열차운행이 중단된 동안 기자가 동행해 선로점검을 했던 이정길씨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15시간의 근무시간 중 선로 내 업무를 마치고 잠시 주어진 휴게시간에 취하는 수면은 야간에 근무하는 지하철 노동자들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다.

"일을 마쳤다고 해도 첫차가 구르기 시작하는 소리를 듣지 않으면 안심이 되지 않아 잠이 오질 않아요."
취재를 마치고 기자는 이씨가 자장가를 연주하는 악기로 생각할 법한 새벽 첫차에 몸을 실었다. 첫차임에도 열차는 승객으로 가득차 있었다. 허름한 점퍼차림에 가방을 감싸안은 아저씨. 외곽에서 도심으로 출근하기 위해 새벽부터 첫차를 타야 하는 회사원. 술내음과 취객으로 가득찼던 전날의 마지막 열차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연장운행을 하려면 첫차운행을 앞당기라던 기관사의 말이 떠올랐다.

문득 지금 이 열차를 운전하는 기관사도 피로에 젖어 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설사 그가 졸고 있더라도 밤샘 취재를 통해 그들의 노동환경을 지켜본 나로선 쉽사리 그의 '직무유기'를 비난하고픈 생각은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