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일 바그다드 알-파두스 광장에 세워진 사담 후세인 동상을 철거하기 전 미군 병사가 동상의 목에 성조기를 두르고 있다. 성조기는 재빨리 이라크기로 대체됐다. 

바그다드가 '함락'됐다.

전쟁은 아직 완전하게 종료되지 않았으나, 이라크 후세인 정권의 붕괴는 이미 기정사실이 되고 있다. 카타르에 주재한 빈센트 부르크 미군 사령관은 4월 9일, "이라크 인들은 상황이 다시는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인식을 하고 있을 것이다"라면서 전세가 마지막 고비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부시 미 대통령은 "바그다드 함락"소식이 전해진 같은 날, 종전(終戰)선언을 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면서, 전후 처리와 관련한 언급을 통해, "이라크인들의 손에 의해 새로운 이라크가 세워질 것이며, 유엔은 인도주의적 지원에 주력해야 할 것"이라고 "유엔의 역할 제한"과 관련한 가이드라인을 내세웠다. 미국의 정치군사적 주도권 아래 계획하고 있는 군정실시와, 분할 통치 및 친미정권 수립에 대한 세계여론의 비판을 비껴나가는 동시에, 유엔의 관여범위를 통제하는 사전조처를 취한 것이다.

초강대국의 무법행위에 세계가 속수무책

개전이 불과 3주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미-영 침략 동맹군의 초강경 공세로 전황의 대세가 판가름 나버린 채, 이라크의 인명과 땅, 그리고 자원은 처절하게 유린되고 말았다.

이로써, 반전(反戰)의 목소리를 높였던 세계는 초강대국의 무법적 침략행위 앞에서 속수무책의 현실을 확인해야 했다. 21세기의 지구촌은, 스스로를 모든 국제법적 기준의 유일한 심판자로 내세운 제국 미국의 폭력에 무릎을 꿇고 만 것이다. 이 가공할 폭력의 지배체제 앞에서 이제 인류는 새로운 선택을 위한 고뇌의 과정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속전속결과 장기전의 전망이 서로 엇갈렸던 가운데, 12년간의 경제제재로 피폐해지고 사찰과정을 통한 무장해제로 약화된 후세인 정권은 예상보다 빠르게 무너지고 말았다.

개전 10일이 지나면서 장기전의 양상과 함께 미국의 패전 가능성까지 논란되었던 것은 후세인 정권의 저항강도가 생각 이상으로 높고 사막지대의 지리적 특성으로 미-영 침략 동맹군의 진격 속도가 늦어질 뿐만 아니라, 아랍진영 전체의 저항의지가 고조되어가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미-영 침략 동맹군이 사막의 수렁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관찰은 필자를 포함한 반전의 입장에 선 이들의 희망사항이었을 뿐, 잘못된 것이었다. 후세인의 이라크는 항불(抗佛) 민족해방전선의 혁명전통이 끈기 있게 주도했던 베트남이 아니었고, 미-영 동맹진영의 화력이 가진 절대적 우세는 반격용 미사일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허장성세(虛張聲勢)의 이라크 군대를 궤멸시키는데 충분하고도 남았다.

더군다나, 제국주의와의 싸움을 중심으로 아랍 민족주의의 집결이 이루어지는데 실패함으로써 이라크는 중동지역 국가들이 수수방관하고 있는 고립무원의 독전(獨戰) 속에서 퇴각, 몰락의 운명에 처하고 말았던 것이다.

미국의 승전(勝戰)은 부인할 길 없는 현실이 되었으며, 이 승전의 결과가 세계정세 전반에 과연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는 실로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중대한 성찰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선제공격의 강공전략이 실천에 옮겨진 미국의 이라크 침략이 한반도 문제 해결에 어떤 파장을 불러올 것인가는 우리 자신에게 절체절명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편으로는, 미국의 승전이 과연 진정한 승전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미국의 지구적 패권을 강조해온 뉴욕타임즈의 컬럼니스트 토마스 프리드만마저도, 식수, 식량 부족과 파괴, 살상의 현실 앞에서 망연자실해 하고 있는 이라크 인들의 현실을 보면서 승리를 자축할 수만은 없는 현실을 고백하고 있다.

진정한 승전인가? 정복자의 논리 거부해야

그는 미국은 "이라크의 해방"을, 아랍권은 "미국의 이라크 점령"을 논하고 있으나, 이라크인들의 현실은 처참하기 짝이 없으며 이를 <정상적으로 복구>해놓지 못하면 승전에 대한 환호는 결코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덧붙여 말하기를 "미국은 이라크를 꺾어 놓았다(broke). 그리고 이제 이라크를 소유(owns)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라크의 현실을 정상화(normalization)시키는 것은 미국에게 최우선의 책임이다"라고 지적했다.

"정복자"라는 노골적인 표현을 하기 어려웠는지 "소유자"의 책임의식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소유관계로 이라크를 파악하고 있는 점령국가의 지식인답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러한 이른바 인도주의적 각성의 촉구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파괴적 사태를 가져온 근본원인이 미국의 침략전쟁에 있고, 점령자의 책임이란 단지 식수, 식량의 공급으로 완료될 수 있다는 기만을 은폐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살육과 침탈, 파괴와 정복을 승전으로 부르는 것은 정복자의 논리에 따른 제국주의 지배전략에 대한 패배주의를 낳게 된다는 점에서 재고의 필요가 절실하다.

<점령정책의 청산 없는 정상상태의 복구>란 점령상태에 대한 불만의 완화일 뿐이지 진정한 문제해결의 답이 아니다. 이스라엘과 팔세스타인 간의 오랜 갈등과 대립의 근본적 해결책이 이스라엘의 점령정책 종식과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이라크 침략전쟁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명백하게도 <21세기 제국주의의 식민지 점령전쟁>이라는 점이다.

이에 동원된 명분은 "악의 축", 방식은 "선제공격", 선제공격과 관련한 구체적 죄목은 "대량살상무기 소지", 해법은 "정권교체", 내세운 목표는 "해방"이다.

정작 실현하고자 하는 목적은 이라크 유전 장악. 중동지역 패권체제 수립, 제국의 군사주의 노선에 의한 일극적 세계체제 건설로 요약된다.

이라크 침략전쟁의 본질은 21세기 제국주의 식민지 점령전쟁

그런데 이러한 침략전쟁의 추진 과정에서 우리는 미국의 패권정책이 어떤 모순과 문제를 노출했는가를 그대로 목격할 수 있었다.

첫째, 국제법상 정당방위 차원의 자위책으로서도 인정될 수 없는 선제공격전략, 둘째, 선제공격의 근거가 될 대량살상 무기 소지에 대한 증거 없이 현실로 옮긴 무력행동, 셋째, 국제법적 규정과 유엔의 논의를 완전히 무시한 일방적 개전, 넷째, 무고한 민간인 살상과 미국 자신의 대량살상 무기 사용, 다섯째, 강제적 정권교체를 목표로 한 주권국가의 주권유린과 국가살해(Killing a nation), 여섯째, 거의 대부분 거짓으로 일관한 미디아 프로파간다, 일곱째, 유엔의 무력화(無力化)로 국제적 분쟁의 권위 있는 해결책 소멸 등이다.

이 모든 현상들은 한마디로 선제공격 대상이 된 나라의 굴복과 점령을 종착지로 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제기되는 일체의 외교적 해법이란 결국 압박, 대결, 침략 등의 군사주의 노선에 대한 기만적인 보조 장치임이 드러난 것이다. 부시정권의 세계정책에서 상호 협상과 외교적 대화의 정상적 기준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이 확실해지고 있는 것이며, 이로써 미국의 정책과 맞서는 나라는 자주적으로 대항할 것인가 아니면 굴복할 것인가, 이 두 가지 가운데 하나의 선택 외에는 없는 상태로 몰리게 되어 있다.



▲ 9일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에서 미 해병대가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의 동상을 끌어 내리고 있다 

이미 이스라엘의 샤론 총리는 부시의 선제공격과 이라크 함락을 본보기로 내세워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에게 저항하는 한, 민족소멸의 가능성까지도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위협하고 있으며, 미국의 공화당 우파는 대북 정책의 강도가 지금보다 훨씬 높아져야 한반도 문제의 근본해결에 이를 수 있다고 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런 가운데 미국 내부의 통제체제도 보다 강경해지고 있어, 부시정권의 전쟁정책에 대한 반대자들을 정치적, 사회적으로 배제하기 위한 <애국법안(Patriotic Act)>의 현재 시한 2005년을 영구적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움직임마저 일고 있어 이번 전쟁의 결과는 미국 사회의 파시즘화에 더욱 이바지할 전망이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경우, 그렇지 않아도 반전운동이 극우적 애국주의의 거센 반격과 권력의 집중적 공격에 직면하고 있는 현실은 갈수록 심화되어갈 것으로 보이고 있다.

미국의 한반도 문제 접근, 군사적 성격 강화 경계해야

반전운동에 대한 경찰의 진압방식은 비무장 평화시위자들을 겨냥해 고무총탄까지 사용하는 등, 매우 위험한 지경에 이르고 있어 전쟁정책의 추진을 통한 미국 사회 내부의 우경화, 민주적 권리 제한, 군수-석유 자본의 지배력 강화는 거침없는 행보를 보일 전망이다. 그리고 이러한 미국 내 지배체제의 강경정책심화는 대외정책상의 일방주의를 더욱 굳게 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제국의 통치체제 강화가 제국에 대한 저항 자체를 모두 무력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이미 아랍권 전역에 걸쳐 미국에 대한 분노(resentment)가 높아지고 있다는 외신의 보도는, 제국의 장래가 결코 안전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제국의 지배를 거부하고 극복할 수 있는 전략의 재정비라는 점에서 이번 전쟁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깊다.

당장 우리로서는 한반도 문제와 관련한 미국의 정책이 외교적 협상의 여지를 줄이고, 강화된 군사주의 노선의 논리가 주도하도록 만들 가능성이 훨씬 높아졌다는 점에서 경계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은 북한의 인권, 핵 문제를 유엔에 상정, 압박강도를 높이는 수순에 들어갔으며 이른바 다자회담의 구조를 통한 <다층적 압박정책>을 펼칠 양상이다. 미국의 논리에 굴복하지 않은 대화는 없다는 것이 부시정권의 입장이자, 이번 이라크 침략전쟁에서 여실히 드러난 제국 미국의 세계경영 방식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최대한 미국의 군사논리에 휘말리지 않고 평화정책의 역량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한, 우리민족의 생존과 한반도의 미래가 전운의 암울한 미래에 빠져들지도 모른다는 점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번 전쟁을 통해서 분명하게 확인된 바는, 유엔이라는 기구의 국제적 역량도 제국의 패권 앞에서 무력했으며 프랑스, 독일의 반전연합도 매우 제한적이었고 중국의 침묵과 러시아의 소극성 또한 이라크의 비극을 막아내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다.

물론 이라크와 한반도의 상황은 다르다는 논리가 내세워지고 있으나, 제국 열강들의 비밀스러운 거래와 외교적 담합, 그리고 현실주의적 계산 앞에서 약소민족의 운명은 언제든지 희생될 수 있는 처지에 놓여 있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따라서, 약소민족의 생존은 강대국의 선의와 열강의 국제정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 내부의 강력한 일체감과 이를 근거로 한 평화정책의 활기차고 적극적인 주도가 아니고서는 항상적 불안과 위기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결국 모든 전쟁행위에서 벗어난 영세중립의 길을 가야

이에는 제국 미국에 대한 정신적 패배주의를 먼저 극복하고, 민족적 단결과 이를 우선적 기반으로 하는 국제협력의 체제를 구성해나가는 외교 전략의 수립이 가장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민족의 장래는 믿을 수 없는 유엔, 기만적인 열강정치의 덫, 제국의 패권에 휘둘려 어려운 지경에 직면하게 된다.

하여 전쟁의 예봉이 이제 다시 어디로 향할지 모를 위험한 상황에서, 한반도에서는 남과 북 간에 활발한 교류와 대화, 각종 제안과 합의, 전격적인 남북공동의 국제적 평화선언,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일체의 전쟁행위에 개입되지 않는 영세중립의 길을 뚫어낼 수 있다면, 이 절박하고 어려운 전시(戰時)의 세계 체제에서 민족의 명운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제국의 침략주의가 한반도를 향해 집중해오기 전, 그 때를 결코 놓칠 일이 아니다. 애초부터 있지도 않은 "제국의 선의"에 의존하려는 의식으로는 민족의 생명을 방어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