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일 이라크 남부 도시 바스라에서 이라크 주민들이 정부 청사에서 솟아오르는 검은 연기를 뒤로한 채 약탈한 물품을 싣고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의 초상화 옆을 지나가고 있다.   
 
국제사회의 의견은 무시하고 이라크를 공격했던 미국이 이제는 국제사회에 색다른 요구를 하고 있다. 이라크의 대외 채무를 탕감해주고 전후 복구사업 비용을 제공하라는 것이다.

약 4000억 달러로 추정되는 이라크의 대외 채무를 그대로 두면 앞으로 수립될 친미 정권은 출범하자마자 파산할 수밖에 없다. 1000억 달러로 추산되는 이라크 재건비용도 미국 혼자 감당할 수 없다.

< AFP통신 >은 "이라크가 석유수출 등으로 벌어들이는 한 해 수입은 250억 달러에 불과하다. 어떤 이라크 정권도 그 엄청난 빚더미 속에서 생존할 수 없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미국
의 요구에 대해 다른 나라들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주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와 함께 모인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누구는 마음대로 총을 쏘고, 누구는 마음대로 전리품을 약탈하고, 누구는 그 비용을 부담하란 말인가?"

미국의 주장대로라면 러시아가 승계한 옛 소련의 부채도 탕감해줘야 한다고 한 러시아 고위 관리는 분개했다.

미국은 전후 이라크 처리에서 유엔의 역할은 인도주의적인 지원에 한정하고 다른 모든 분야에서는 주도권을 행사하겠다고 공언했다. 사담 후세인을 몰아내는 데 피를 흘린 나라들의
당연한 권리라는 것이었다.

이런 미국은 이라크 대외 채무 탕감 요구를 '전쟁에 반대했던 나라들이 이라크 전후 처리에 참여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라크라는 전리품은 미국이 챙기고 대신 먼지가 묻고 많이 손상된 그 전리품을 원상복구하는 비용은 국제사회가 부담해야 한다는 말이다. 국제사회의 '권리'는 무시하고 '의무'만 강요하는 셈이다.

미국의 전략문제연구소(CSIS)가 지난 3월 말에 내놓은 보고서를 보면 대외 채무, 쿠웨이트 침공 보상금, 공사대금 미 지급분 등을 합친 이라크의 총 부채규모는 3830억 달러다.

일단 대외 채무가 1270억 달러로 이 가운데 470억 달러가 이자다. 러시아와 프랑스의 경우 각각 원금만 90억 달러(일설에는 120억 달러)와 80억 달러가 물려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나라가 강력하게 이라크 공격을 반대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도 이라크에 대한 채권 때문이었다.

이라크는 1980~88년 이란과 전쟁을 치르면서 다른 아랍국에게서 300억 달러를 빌렸다. 이 가운데 쿠웨이트가 빌려준 돈이 170억 달러다.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인다면 이들 나라들은 나중에 이른바 '빚잔치'나 해야할 판국이다.

에너지, 통신, 도로, 항만 등의 분야에서 공사를 해주고 외국 업체들이 받지 못한 공사대금, 계약 미이행으로 인한 피해액 등이 570억 달러다.
 
 러시아가 가장 많은 공사대금을 못 받고 있고 중국, 네덜란드, 아랍에미레이트 등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현대건설도 11억4000만 달러가 물려 있다.

특히 석유사업과 관련된 러시아의 고민은 더욱 심각하다. 후세인 정권 하에서 체결한 계약이 모두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러시아 최대 석유회사 루크오일은 앞으로 탄생할 이라크 정부가 수십억 달러 규모의 종전 유전개발 계약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할 계획이다.

루크오일은 1997년 이라크 에너지부 및 다른 2개 러시아 회사와 컨소시엄을 구성해 서부 쿠르나-2 유전 개발 계약을 체결했고 전체 지분의 68.5%를 소유하고 있다.

이라크가 갚아야 할 걸프전으로 인한 전쟁 배상금도 골칫덩어리다. 160억 달러는 갚았지만 당장 갚아야 할 것이 270억 달러다. 이것을 빼고도 여전히 1700억 달러가 남아 있다. 당연히 쿠웨이트 몫이 가장 많다. 그러나 < BBC >는 쿠웨이트가 미국으로부터 전쟁배상금을 포기하라는 압력을 강하게 받고 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부서진 도로, 철도, 항구, 학교, 공공시설 등을 복구하는 재건비용도 막대하다. 재건비용 규모는 최소 250억 달러에서 최대 4200억 달러까지 다양한 추정이 나오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1000억 달러 안팎에 이를 것으로 보고있다.

언뜻 생각하면 이라크에서 생산되는 석유를 팔아 비용을 조달하면 간단할 것 같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다르다.

1991년 걸프전 이후 경제제재를 받기 시작하면서 이라크는 석유 수출 자체를 봉쇄 당했다.
단 유엔이 만든 '석유식량교환프로그램'에 의해 이라크 국민들의 기초 생활을 위한 의약품, 식량 등을 구입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만 석유 수출이 가능했다.

이렇게 석유수출로 벌어들이는 돈의 72%는 식량, 의약품 등의 구매에 25%는 전쟁배상금으로, 나머지는 이라크에 있는 각종 유엔 기구의 운영비로 쓰였다.

전문가들은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 이라크의 석유를 팔아 마련한 자금 가운데 재건비용으로 돌려 쓸 수 있는 돈은 한 해 30억-40억 달러에 불과할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라크의 원유생산량을 당장 늘릴 수도 없다. 현재 이라크의 산유량은 공식적으로 하루 170만 배럴이고 유엔의 눈을 피해 시리아를 통해 몰래 판 밀수출 분까지 합쳐도 하루 250만 배럴 수준이다.

걸프전 이전 수준인 350만 배럴까지 회복하려면 앞으로 3년간 매년 50억 달러를 쏟아부어야 한다. 그러나 < BBC >의 보도에 의하면 미국이 유전 복구를 위해 책정한 예산은 20억 달러에도 못 미친다.

여기에다 이미 세계 유수의 석유회사들은 이라크의 유전이 민영화될 것을 기대하면서 군침을 흘리고 있다. 이라크의 석유사업이 민영화되면 앞으로 이라크 국민을 위한 재건비용 조달은 더욱 어려움에 처한다.

미국의 요구에 대해 다른 나라들은 이라크 공격을 반대하면서 내걸었던 '국제사회의 역할'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우리는 부채 탕감 문제를 고려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오는 6월 프랑스에서 열리는 파리클럽과 G8 회담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했다.

국제사회의 틀 안에서 해결하자는 말이다. IMF와 세계은행의 반응도 마찬가지다.

제임스 울펀슨 세계은행 총재는 "새로 구성되는 이라크 정부가 유엔으로부터 인정을 받기 전에는 이라크에 자금을 지원할 수 없다"고 밝혔다.

프랑스의 프랑시스 메르 재무장관은 "정부가 바뀌었다고 해서 부채가 탕감될 수는 없다"고 말해 미국의 요구를 거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