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상황을 관망하며 움츠려 있던 돈이 돌기 시작했다. 초저금리에 지친 자금들이 조금이라도 높은 수익이 보이면 쏜살같이 움직이고 있다.
증시를 비롯해 금융시장에 훈풍이 도는 분위기다. 그동안 머니마켓펀드(MMF), 종합자산관리계좌(CMA) 같은 단기상품에 머물며 대기하던 부동자금(약 800조원)이 투자처를 찾아 나서고 있는 것이다. MMF 잔액은 지난달 16일 사상 최고치로 126조원대를 찍은 후 매일같이 감소해 현재 120조원을 밑돌고 있다. 반면 증시 예비자금의 지표로 알려져 있는 고객 예탁금은 1일 현재 13조원을 웃돌아 지난 9월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 파산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회사채 시장에는 연일 개인 투자자들이 몰려들어 '돈의 흐름'을 피부로 느끼게 한다.
◆다시 움직이는 공격적 투자자
서울 서초구에 사는 자영업자 김모(55)씨는 지난달 머니마켓펀드(MMF)에 넣어뒀던 여윳돈 5억원을 빼내 국내 우량주를 사들였다. 김씨는 "아직 바닥을 완전히 찍었다는 확신은 없지만 지금이 험악한 하락장은 어느 정도 끝난 바닥 근처라 본다"며 "상승 파도를 잘 타서 제때 빠져나오면 정기예금 이자 몇 배는 챙길 수 있다"고 말했다.
개인 투자자들의 심리가 호전되고 있다는 신호는 여기저기에서 감지되고 있다. 은행과 증권사 PB팀장들은 "지금 주식을 살 때가 아니냐"는 질문이 부쩍 늘었다고 입을 모은다. 단기 금융상품에 자금을 넣어놓고 시장을 외면해 오던 큰손 고객들이 돈 보따리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현주미 굿모닝신한증권 센터장은 "고객들 사이에 경기선행지수, 경기실사지수 등 각종 경제 지표들이 좋아져 경기가 바닥을 통과했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고 말했다. 강지현 하나은행 PB팀장도 "1~2월만 해도 주식이나 펀드 등 위험자산 얘기를 꺼내면 아주 적대적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유연해졌다"며 "펀드로 손실본 것을 만회하기 위해 직접투자에 나서는 고객들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단기 차익을 좇아 위험자산 쪽으로 흘러가는 자금은 크게 늘고 있다. 지난달 국내·해외 주식형 펀드는 올들어 처음으로 순유입(환매액보다 신규 설정액이 많은 것)을 보였다. 이 기간 유입된 금액만 663억원에 달한다.
경기 불확실성으로 외면받았던 B등급 고위험 채권으로도 돈이 몰리고 있다. 장외 채권시장에서 개인의 회사채 순매수 규모는 지난달 3615억원으로, 전년 동월 대비 2.5배 가까이 늘어나 '묻지마 투자' 양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일부 자산가들은 부동산 사냥에도 나서고 있다. 김은정 신한은행 PB팀장은 "금리 급락으로 일정 수익이 나오는 수익형 부동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며 "특히 강남 등에 위치한 중소형 빌딩 입질이 활발해지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아직 경기 회복 국면은 아니기 때문에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강우신 기업은행 PB팀장은 "전 세계적으로 악재들이 투명하게 전부 드러나지 않은 상태여서 후폭풍이 예상된다"며 "본격적인 추세 반전이라고 보고 개인 투자자들이 덤비기에는 아직까지 위험 요소들이 너무나도 많다"고 우려했다.
◆번지는 재테크 '5% 룰'
보수적인 성향의 투자자들은 조금이라도 높은 확정 금리를 주는 금융 상품으로 몰려가고 있다. 연 5% 이상만 확정금리를 내걸면 어떤 상품이든지 시중에 떠도는 뭉칫돈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재테크 시장에 '5% 룰'이 형성된 분위기다. 민주영 미래에셋투자교육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위험 자산 보유를 꺼리는 비관적인 투자자들도 상대적인 고금리의 유혹은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25일 하나HSBC생명이 내놓은 연 5%를 10년간 확정해서 주는 '하나세이프연금보험'은 1주일 만에 300억원의 모집 한도가 차버렸다. 우정사업본부가 지난달 24일 출시한 '빅보너스 저축보험'은 기본 이율 5.5%에 보너스금리 5%를 얹어서 첫해에만 연 10.5%(10년 만기)를 주는 상품인데, 판매 첫날에만 3000억원이 몰려 왔다. 외환은행이 지난달 30~31일 2500억원 한도로 판매한 연 7.3%의 하이브리드채권도 부자 고객들이 앞다퉈 돈을 넣으면서 하루 만에 2300억원이 팔렸다. 신협, 새마을금고, 단위농협 등 비과세 혜택으로 실질 금리가 연 5%대에 달하는 곳도 상황은 마찬가지. 신협중앙회에 따르면 전국 신협의 지난달 예·적금이 1조3332억원 늘었다. 지난 1월 이후 3개월 연속 수신이 1조30 00억원을 넘은 것이다. 작년 1월만 해도 신협 수신은 1238억원 느는 데 그쳤다. 월별 수신이 10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신협중앙회 관계자는 "매일 평균 620억원 이상의 돈이 몰려오고 있다"고 말했다. 새마을금고도 작년 11월까지만 해도 예·적금 증가액이 월별로 1000억~2000억원에 불과했는데, 지난 1월엔 2조576억원, 2월엔 1조9095억원 늘었다. 단위 농협도 작년 12월 이후 올해 2월까지 7조1000억원의 예금이 늘었다. 신협, 새마을금고, 단위 농협 등은 비과세 혜택으로 인해 실질 금리가 은행보다 2%포인트 정도 높다.
그러나 '확정금리'를 중시하는 투자 전략에도 약점은 있다. 한상언 신한은행 압구정PB센터 팀장은 "고금리 확정 상품은 대부분 장기로 모집하기 때문에 돈이 묶이게 될 위험성이 있다"며 "변동성이 심해질 때 기회를 잡기 위해 돈을 짧게 굴리는 게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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