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노조', 40분 앞서서 신고서 제출해
27일 호텔신라 노조 설립 취하...삼성, 복수노조 맹점 활용
 
삼성 계열사인 호텔 신라(대표이사 이만수)의 노조 설립이 결국 무산됐다. 호텔 신라 직원 임장호씨를 비롯한 4명이 지난 3월 25일 서울 중구청에 노조 설립 신고서를 제출하면서 삼성 계열사의 노조 설립 여부가 재계를 비롯한 노동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노조 설립 신고서를 냈던 이들 4명이 27일 오후 노조 설립 취하원을 제출하면서 관심을 모았던 삼성 계열사의 노조 설립은 결국 '해프닝'으로 끝났다.

서울 중구청 지역경제과 담당자는 27일 오후 4시께 민원실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호텔 신라 직원인 임장호씨를 비롯한 4명이 중구청 민원실을 방문해 노조 취하원을 제출했다는 내용이었다. 중구청 관계자는 "노조 발기인 4명 인장이 찍힌 서류를 받았다"고 밝혔다. 중구청 지역경제과 담당자는 예민한 문제인 만큼 노동부에 호텔 신라 노조 필증 교부와 관련해 자문을 구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노조 설립 반려로 그 계획은 취소되고 말았다.
 
호텔 신라 노조 설립 무산에 대해 재계를 비롯한 노동계는 "노조를 인정하지 않는 삼성의 철저한 인력관리와 복수노조 금지 조항이 삼성 계열사의 노조 설립을 또 무산시켰다"고 분석하고 있다. 결국 철저하게 준비된 삼성의 '무노조' 정책과 복수노조 금지라는 현행법 때문에 호텔 신라의 노조 설립은 이루지 못한 '꿈'이 되고 말았다.

두 개의 노조 설립 신고서

3월 25일 오후4시 40분쯤 노조 설립 신고서를 들고 서울 중구청을 방문한 사람은 호텔 신라 노조 발기인 2명과 민주노총 서울본부 관계자, 그리고 이 사건 취재를 위해 동행한 노동전문지 기자 등 4명이었다.

노조 설립 신고서를 제출하고 중구청을 나온 지 20분 뒤에 노동전문지 기자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저는 삼성 구조조정본부의 하 아무개 과장입니다. 호텔 신라 노조 설립과 관련해서 기사 쓰실 겁니까?"

전화를 받은 기자는 발빠른 삼성의 대응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삼성 계열사인 호텔 신라에 노조 설립이 추진된다는 보도가 나가자 삼성 구조조정본부는 대책 마련에 부심했다. 호텔 신라 역시 '노조 설립은 안 된다'는 회사 방침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이번 행동을 그대로 방관할 수는 없었다. 특히 호텔 신라는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장녀 이부진씨가 부장으로 재직하고 있어 관심이 더 높았다.

노조 설립 신고서를 제출한 이후 임장호씨를 비롯한 노조 발기인 4명에게 핸드폰으로 계속 전화가 걸려왔다. 호텔 신라 관리자들은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늦은 밤까지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노조 발기인들 4명은 25일 밤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다음날인 26일 평소와 다름없이 4명은 정상적으로 출근을 했다. 그러나 이들은 출근 이후 정상적으로 근무를 하지 못했다는 게 민주노총 서울본부측의 설명이다. 민주노총 서울본부는 "회사가 면담을 요구하며 노조 간부 한 명마다 3~4명씩을 동원해 설득작업을 벌인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전화를 했더니 주위에 사람이 있어서 전화 받기가 곤란하다는 대답을 계속 했다"고 밝혔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에 따르면, 노조 설립 신고서 제출시 서류에 문제가 없는 이상 해당관청은 3일 이내에 설립신고 필증을 교부하도록 돼 있다. 호텔 신라 노조에 문제가 없었다면 노조설립필증을 늦어도 3월 28일 오후4시 40분 안에 발부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서울 중구청에 노조 설립 신고서를 제출하기 40분 앞선 3월 25일 오후4시경에 호텔 신라 다른 직원 명의로 서울지방노동청에 또 다른 노조 설립 신고서를 제출했던 것이다.

현행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부칙 제5조 3항에 따라 복수노조는 2006년까지 금지돼 있다. 즉 같은 사업장에 조직대상이 같은 두 개의 노조가 성립될 수 없다는 게 이 법의 골자다. 이 때문에 같은 사업장에서 두 개 이상의 노조설립신고서가 제출되면 먼저 접수증을 발급 받은 쪽에 노조 설립 우선권이 주어진다.

일반적으로 노조 설립 필증을 받기 위해서는 관할 관청에 신고하도록 돼 있다. 단 2개 이상 사업장이 광역시.도에 걸쳐 있을 경우 노동부에도 노조 설립을 신고할 수 있다. 호텔 신라의 다른 직원은 서울뿐 아니라 제주도에 호텔이 있다는 점을 이용해 서울 중구청이 아닌 서울지방노동청에 노조 설립 신고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서울지방노동청은 제출된 서류에 서울과 제주 호텔 신라 가운데 서울 호텔 신라만 노조를 설립한다는 조항에 따라 3월 27일 오전 서류를 중구청으로 이관했다. 서울지방노동청에서 이관된 노조설립신고에 대해 중구청 관계자는 "몇 가지 부족한 부분이 있어 보완을 요구했다"고 밝혀 '급하게' 만들어진 노조 설립 신고서라는 의혹을 갖게 만들었다.

호텔 신라 인사팀 관계자는 "노조 설립 움직임은 전혀 몰랐고, 서울지방노동청에 누가 노조 설립 신고서를 냈는지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고 밝혔다.

회사측 노조 설립 움직임을 몰랐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40분 먼저 노조 설립 필증을 제출한 사실을 보면 이미 노조 설립 움직임을 포착하고 대책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민주노총 서울본부에 따르면, 노조 결성에 참가했던 호텔신라 직원 4명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 3월 26일 저녁 7시부터 31일 현재 연락이 되지 않고 있다. 민주노총 서울본부는 "처음에는 회사에 출근하지 않았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전화 통화하기 어렵다는 답변을 들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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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은 '무노조' 기업 경영을 강조하고 있다. 사진은 서울 남대문로 소재 삼성그룹 사옥 전경. 
 
복수노조금지 조항을 이용한 삼성의 노조 설립 봉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삼성에스원 노동자 5명은 2000년 5월 14일 민주노총 공공연맹과 노조 설립 신고서를 제출했으나 회사가 20분 먼저 노조 설립 신고서를 강남구청에 제출해 결국 노동조합 설립 신고서가 무효화된 적이 있다.

또 2001년 4월 6일에는 경북 지역 삼성에스원이 노조를 설립하기 위해 대구 동구청에 노조 설립신고서를 제출하였으나 복수노조가 인정되지 않는 현행법 때문에 서류가 반려되기도 했다.

2000년 11월 14일에는 수원 삼성코닝 사내기업 노동자들이 노조설립신고서를 제출했지만 회사가 5분 먼저 노조설립신고서를 수원시청에 제출해 결국 노조 필증을 교부 받지 못했다. 이 밖에도 1999년 11월 삼성SDI에 근무했던 박 아무개씨는 노조를 준비한다는 이유만으로 회사에 납치를 당해 '노조를 설립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요구받기도 했다.

이러한 삼성의 철저한 '무노조 정책' 때문에 호텔 신라의 경우 매우 극비리에 노조 설립을 추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노조 설립 발기인 4명은 지난 2월 민주노총 서울본부에 노조 설립 의사를 타진했으며, 이후 조합 설립 신고까지 치밀하게 준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25일 설립 신고서를 중구청에 제출한 노조 발기인들은 800여 명의 가입대상 조합원들에게 동시에 문자 메시지로 노조 설립을 알리기도 했다.

그러나 삼성의 대응은 한 발 앞섰다. 호텔 신라는 노조 발기인들 4명을 철저히 설득해 두 손을 들게 만들었다. 삼성 구조조정본부는 26일부터 기자들에게 "아직 정식노조 설립 허가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좀 더 두고 봐야 하지 않겠느냐, 기사는 그 때 써도 늦지 않는다"면서, "노조를 만들었던 사람들은 문제가 많았다. 잘 해결될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삼성그룹 계열사 가운데 노조가 있는 곳은 삼성화재, 삼성생명, 삼성중공업, 삼성정밀화학 등 4곳. 그러나 이들 기업들은 합병하는 과정에서 기존에 있던 노조가 함께 넘어온 것이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삼성의 '자생적 노조'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이들 노조는 활동이 극히 미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경실련 노동위원회 위원장 이광택(국민대·노동법) 교수는 "복수노조 금지 조항을 이용한 삼성의 무노조 전략은 오래 전부터 문제가 됐었다"면서 "노조 설립을 막기 위해 설립된 유령노조의 실체 여부를 정보공개를 통해 알리고, 설립신고를 취소를 요구하는 방법을 취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노무현 정부에서 노동정책을 추진할 한 핵심 관계자는 "새 정부 노동정책의 기본 방향은 개발시대 논리인 '안티 유니온'이 아니라 노조를 새로운 파트너로 인정하는 것"이라면서, "복수노조 문제는 현행법에 접촉되기 때문에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복수노조금지와 전임자 임금 문제 논의를 앞당겨야 한다는 게 노 대통령의 노동공약이었던 만큼 고민해 볼 여지는 있다"고 말해 '복수노조'가 논의 될 수 있음을 암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