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민련이 일어섰나? 지하철 6호선 광흥창역의 계단입구에 전경 2명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사위를 둘러보니 출구마다 전투경찰이 2인 1조로 배치되어 있었다. 광흥창역 인근에 소재한 주요시설이라고는 자민련 중앙당사가 고작이다. 미디어몹 사무실을 봉쇄하려고 경찰이 경비를 자청할 리는 만무하다.
글쟁이 특유의 육감으로 어림짐작을 해봤다. 전국공무원노조는 11월 15일 오전 9시부터 파업에 돌입하기로 결정했다. 당국은 전국공무원노조의 쟁의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강경대응할 방침임을 천명했다. 방침의 내용과 골자는 뻔하다. 주동자검거와 책임자처벌이다. 경찰은 공무원노조 지도부를 체포하는데 총력을 경주하고 있다. 홍길동이 아닌 바에야 이런 상황에서 전공조 지도부가 피신할 곳은 극히 한정돼있다. 그중의 하나가 정당당사다. (이어진 언론보도와 정황을 종합하면 공권력의 광흥창역 진주는 공무원노조원들의 신촌대학가 집결을 저지하려는 조치였던 것으로 분석된다)
총파업을 결의한 조직은 전국공무원노조만이 아니다.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중핵인 민주노총 또한 총파업을 선언했다.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결의한 자리가 바로 2004 전국노동자대회였다.
내 입장에서는 엄청 오랜만에 참여해보는 노동자집회였다. 현장스케치 차원에서 출동한 터이므로 참가라고 하기에는 낯간지러운 구석이 없지 않다. 행사장은 광화문일대였다. 집회는 공식적으로 오후 3시부터 시작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내가 시청역에 도착한 2시 30분경에는 벌써 시청부근까지 집회의 영향범위에 놓여 있었다.
조선일보사옥을 지나 동화면세점에 다다르자 인도에서 격렬한 언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장애인이동권연대 소속 장애우들과 경찰이 도로횡단 여부를 둘러싸고 설전을 펼치고 있었다. 나는 잠시 멈춰서 싸움을 관전했다. 승패의 결과는 확인하지 못했다. 서둘러 광화문방면으로 걸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토요일 개최된 전국민중대회에서 폭력사태가 빚어진 여파였던 듯 행사장 주위를 대규모 경찰병력이 철통같이 에워싸고 만일의 불상사에 대비하고 있었다. 전경들 역시 본질적으로 민중의 자제들이다. 우리가 꿈꾸는 것은 유혈충돌도 무장봉기도 아니다. 국민은 평화로운 변혁을 지지하고 염원한다.
2004 노동자대회는 다양한 구호와 요구를 내걸고 진행되었다. 그렇지만 중심주제는 단연 비정규직 철폐였다. 수만의 정규직 노동자들이 동병상련의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연대하고자 거리를 가득 메운 것이다.
노동은 헌법에서 보장된 국민의 신성한 권리이자 의무이다. 구태여 헌법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부모로부터 거액의 유산을 상속받지 않은 이상 몸을 움직이는 육체노동이든 머리를 굴리는 정신노동이든 우리는 일을 하지 않고는 기초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가 없다. 노동은 인간에게 주어진 불기피한 숙명이다. 생계를 유지하려면, 가족을 부양하려면 노동을 해야 한다.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입에 풀칠을 하지 않으면 지상에서 숨을 쉬기가 불가능하다. 사람은 추상적으로 사유하고 판단하는 이성적인 존재인 동시에 구체적으로 먹고 입고 자는 생물학적 존재인 까닭이다.
노동은 생존의 조건이자 동시에 인간적 자존의 전제다. 실직이 괴로운 이유는 단지 가벼운 주머니사정 탓만은 아니다. 어떤 강심장도 실업자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주변의 싸늘한 시선을 대하면 새가슴이 되기 마련이다.
'특별한 불경기'가 구조화ㆍ장기화하면서 실업과 실직의 그늘이 짙고 깊어지고 있다. 청년들의 취업난에도 좀체 숨통이 트이지 않는 형편이다. 일자리 부족을 부분적으로 보완해주던 소규모 창업열풍은 시들해진지 오래다. 자영업자들은 못살겠다며 솥단지를 내던진다.
예나 지금이나 아무리 더럽고 치사해도 남의 밑에서 꼬박꼬박 월급을 받아먹는 월급쟁이는 선망되는 직종이다. 수입의 규칙성과 직업의 안전성은 봉급쟁이들이 항시 푸념의 대상으로 늘어놓는 쥐꼬리만한 월급을 상쇄하고도 남아도는 미덕이자 매력이었다.
미국식 신자유주의는 노동의 안정성보다는 유연성을 우위에 둔다. 노동의 유연성! 의도적으로 일그러뜨린 언어의 거울은 현실을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왜곡해서 반사하서 일쑤다. 미국은 무수한 이라크 민중들의 희생과 출혈을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라는 경제학적 용어를 빌려 무대 뒤편으로 밀어내버린다.
노동유연성의 증대는 임시직 및 계약직의 증가와 동전의 양면관계다. 노동의 유연성에 기초해 사고하면 희로애락의 감정을 가진 수백만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초라한 수입에 의지해 연명해야하는 수천만 국민들은 국가경제에 경직성과 주름살을 유발하는 기생적 잉여인간이나 귀찮은 이물질에 지나지 않는다.
비정규직은 특별한 불경기에만 발생하는 비정규적 현상이 아니다. 비정규직은 미국식 신자유주의의 항상적 특징을 이루는 정규적 특성이다. 자본은 비정규직을 늘려야 기업의 효율이 향상되고 나라의 경쟁력이 강화된다고 강변한다.
웃기는 소리다. 희망의 확대재생산만큼 노동자를 효과적으로 착취하고 수탈하는 메커니즘도 드물다. 희망이 있어야 인간은 피와 땀과 눈물의 고통을 자발적으로 감당한다. 신자유주의는 노동자를 우선적 사상자로, 희망을 부수적 피해자로 만든다. 이제는 어떤 비정규직 노동자도 묵묵히 일만 열심히 하면 상대적으로 안정된 정규직으로 신분이 상승될 수 있다는 기업주들의 달콤한 속삭임에 속아넘어가지 않는다. 그들은 안다. 부지런히 일해봤자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돌아오는 대가는 서늘한 해고통지서임을.
노동자대회 참석자들의 대다수는 정규직 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은 본인들의 임금인상이나 법정근로시간 단축을 촉구하려 모인 게 아니었다. 언뜻 그들과는 인연이 덜해 보이는 비정규직 노동의 폐지를 외쳤다. 노동자들은 정규직이 비정규직의 내일이 아니라 비정규직이 정규직의 미래임을 깨닫고 있다.
나는 대한민국의 정규직 노동자들이 특별히 선하거나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쩌면 자기들의 밥그릇에 집착하는 이기적 노동귀족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노동귀족은 걸핏하면 '눈물'과 '진정성'을 주절대며 서민대중의 실질적 삶과는 무관한 정치게임에 몰두하는 팔자 좋은 무리들과는 달리, 차별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해 한잔의 오뎅국물로 몸을 녹이며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장시간 주저앉아 팔을 휘두르고 목청을 높이는 고역과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자본과 정권은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보내는 정규직 노동자들의 애정과 러브콜을 쇼라고 매도할 게다. 아니면 순망치한을 두려워한 집단이기주의의 발현이라고 평가절하할 터. 그러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알고 있다. 관심이 있어야 쇼도 한다는 사실을. 순망치한은 노동자계급의 대동단결을 촉발시키고 결사투쟁을 추동해온 원초적 기폭제라는 역사적 경험을.
제도정치권에서는 유일하게 민주노동당 국회의원들만이 노동자대회에 얼굴을 내비쳤다. 시도 때도 없이 주구장창 일방적으로 자본가만을 편들어온 한나라당 양아치들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시민사회의 응원과 성원 덕택에 대거 의회에 진출한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단 한명도 연단에 등장하지 않았다.
대통령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초강력 고성능 앰프로 작동되는 정부여당, 농민과 노동자와 서민대중에게는 고장난 스피커에 불과했다. 국회에서 사생결단으로 끊임없이 막말대결을 불사하는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는 이심전심 말이 필요 없는 강철대오를 형성한 셈이다. 윤민석이 그랬지? 너흰 아니라고.
- 본문은 미디어몹(www.mediamob.co.kr)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