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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대 내의 성추행, 성폭력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인권단체들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그 실태는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전문가들은 "군대는 성폭력의 사각지대"라며 대책마련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 9일 경기도 의정부시 한 아파트에서 휴가나온 김 모 일병이 투신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군 수사기관은 고참의 강제 성추행에 괴로워하던 김 일병이 끝내 자살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로부터 나흘 뒤인 지난 13일 육군은 모 부대 대대장인 손아무개(46) 중령을 부하사병 성추행 혐의로 구속했다고 밝혔다. 군에 따르면, 손 중령은 지난달 초부터 지난 3일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부하 사병을 성추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군부대 내의 성추행, 성폭력이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다만 그동안 군대라는 특수성 때문에 이 문제를 제대로 공론화시키지 못했고, 또 이를 제대로 밝히려는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천주교 인권위원회가 국가인권위원회의 의뢰를 받아 지난해 9월부터 두 달간 휴가 나온 병사 232명과 전역 1년 미만의 대학생 14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9.12%인 34명이 군 생활 중 강제로 성적 접촉행위를 경험한 것으로 드러났다. 10명 중 1명 꼴이다.

이보다 앞서 지난 2000년 정대철 민주당 의원이 국방부에 대한 국방위 국정감사 때 밝힌 '군대 내 성추행 실태자료'도 충격적이다. 정 의원은 이 자료를 통해 98년 이후 현역 장병들의 성범죄는 '강간 244건, 동성 간 추행 133건을 포함, 총 666건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정 의원은 또 휴가 나온 사병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 한 결과 응답자의 10.5%가 성폭력이나 성희롱을 강요받거나 보고 들은 것으로 밝혀졌다.

피해 형태도 성행위 흉내내기(30.2%), 신체 애무(15.9%), 성경험담 말하기(14.5%), 동침행위(12.7%), 자위행위(9.5%), 성기 애무(3.2%) 등의 순으로, 무시 못할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미 3년전에 이런 통계자료가 발표됐음에도 군은 그동안 수수방관한 셈이다. 최근 두 건의 성추행 사실이 밝혀지고 나서야 군은 13일 "대책반을 구성하겠다"고 나섰다. 그간 군 당국이 자체적으로 실시한 공식적인 성추행 실태조사도 거의 전무하다.

이를테면 군대는 '성폭력의 사각지대'인 셈이다. 전문가들은 군대 조직의 특성상 성추행 사건을 공론화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다.

군대는 '성폭력의 사각지대'인 셈

안주리 천주교 인권위 사무국장은 "내무반에서 생활이 이뤄지고 상급-하급 관계라는 상명하복 조직에서 누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 외부에서 알기 어렵다"며 "군의 특성 상 철저히 가려지기 쉽다는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천주교 인권위에서 발표한 설문자료 중 '군 생활 중 구타행위나 가혹행위를 목격하거나 당했을 때 어떻게 했는가'란 항목을 보면 이같은 문제가 잘 드러난다.

이에 따르면 응답자의 75.91%에 달하는 271명이 '못 본 척 하거나 참았다'고 답했다. 응답자들은 그 이유로 '보고나 신고를 해도 소용없을 것 같아서'(58.78%)를 꼽았다. '부당대우나 보복이 걱정돼서', '함께 처벌 받을 것 같아서'란 답변도 26.88%에 달했다.

이밖에도 피해자 자신이 성추행을 당했다고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여성전문 주간지 <여성신문>은 지난 2001년 7월 기사 <동성간 성폭력 "말해야 한다">를 통해 이같은 점을 지적했다.

동성간 성폭력도 이성간 성폭력과 같은 맥락서 봐야

이 기사에 따르면, "성폭력을 '남성이 여성에게 성기를 이용해 가하는 폭력'이라고 간주하는 사회통념상 동성간 성폭력 피해자는 자신이 성폭력을 당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남자끼린데…' '장난일 뿐이다'라고 가볍게 여긴다"고 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동성간 성폭력도 이성간 성폭력과 같은 맥락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군대 내 성폭력도 '권력관계'에서 일어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성폭력과 다를 바가 없다.

이 문제와 관련 젊은 여성주의자들의 모임 여성해방연대(www.feminist.or.kr)의 운영위원인 소란씨는 "군대라는 구조 자체가 폭력이 일반화해 있는 위계적인 사회이니 성폭력 또한 쉽게 일어날 수 있다. 강자(권력을 가진자)가 약자에게 행하는 폭력이라는 점에서 이성간 성폭력이나 동성간 성폭력은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여성해방연대와 천주교 인권위는 "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여러 개혁이 있어야 한다. 신병 때부터 성폭력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고 이에 대한 상담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지적하면서도 "하지만 이런 개혁이 현재의 군에서 쉽게 이뤄질 지는 의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 입을 여는 것은 어떨까? 지금까지 내 일이 아니라고 입을 닫았다면, 당했어도 '말해봤자'라고 고민했다면 이제는 말해보자. 나는 피해자였나, 아니면 방관자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