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인간관계를 맺는 첫 단추가 너무 복잡하다." 청와대
경제보좌관으로 있는 정문수 전 인하대 경제통상학부 교수가 한
말이다.
실제 우리나라에는 호칭을 잘못 썼다가 당하는 화(禍)가 유달리
많다. 공무원 A씨 는 새롭게 부임한 정부부처 차관에게 인사차
전화를 걸어 "B국장님 아니신가요"라 고 잘못 물었다가 "아닙니
다"라는 짤막한 답을 듣고 간담이 서늘했다.
류미애 신세계백화점 교육팀 주임은 "직원 교육을 위해 강사를
섭외할 때도 강의 질이나 콘텐츠를 생각하기에 앞서 교수, 소장,
박사 등 강사 호칭을 뭐라 할지 고 민한다"고 털어놓았다.
정 보좌관 말에 일리가 있는 셈이다. 첫 만남에서 좋은 호칭을
쓰기 위한 우리나라 사람의 노력은 대단하다. A커뮤니케이션즈
정 모 팀장은 "첫 만남에서 상대하는 사 람의 연령과 성별, 과거
경력 등을 미리 조사해야 입이 떼진다"고 말했다.
호칭은 사람을 '꽃'으로 만든다고 시인 김춘수 선생이 썼다. 우
리나라 호칭제도는 사람을 '꽃'으로 만들기가 참 힘들다.
◆ 수평적 기업문화와 맞지 않다＝우리나라 호칭은 마치 에스
키모들이 '눈(雪)'을 20가지 단어로 표현하는 것처럼 개별 인간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독특한 문화적 특 징인지는 몰라도 수직
적 성격에서 수평적으로 바뀌어가는 기업문화에는 맞지 않다 는
지적이 많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일을 어떻게 해 나갈까'보다 '이 사람을
어떻게 부를까'를 고민하는 시간이 많아서는 곤란하다. 또 직장
상사에게 '부장님' '차장님' 등의 존 칭에 짓눌려서 할 말을 제대
로 못 하는 것도 문제다.
박덕제 방송통신대 경제학부 교수는 "호칭의 벽이 높아서, 또는
어떻게 불러야 할 지 몰라서 이야기를 못하는 사례가 허다하
다"며 "수평적 관계를 지향하는 오늘날 기업문화와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실제 우리나라에서 호칭은 나이에 따라 달라진다. 같은 직장, 같
은 직급으로 일해 도 나이 많은 회사 동료에게 '씨'라고 부르긴
어려운 때가 많다. 이런 상황이니 팀 제를 도입하는 기업에선 팀
장에서 팀원으로 강등(?)된 사람을 부르기가 여간 난감 한 게 아
니다.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도 호칭에 영향을 준다. 패스트푸드점
에서 계약직으로 일 하는 황미영 씨(24)는 동료들끼리는 '~씨'라
고 불러야 하지만 정규직인 지점장에게 는 '점장'이라고 공손히
불러야 한다.
남영신 국어문화운동본부 소장(한글학자)도 "한국의 호칭은 상
대방이 좋아하는 쪽 을 쓰려고 하다 보니까 자꾸 새로 생기고 진
화한다"며 "그 결과 적절한 호칭 찾기 가 더욱 어려워진다"고 말
했다. 예를 들면 예전에는 찻집에서 일하는 여성을 '아가 씨' '처
녀'라고 불러도 됐지만 이제는 여성비하 발언이 될 수도 있으니
새로운 호 칭이 필요하게 된다. 갈수록 복잡해진다.
◆ 호칭을 바꾸면 노동유연성이 높아진다＝학자들은 호칭을
바꾸면 노동유연성이 높아진다고 지적한다.
인력을 자유롭게 배치하는 데 현재 호칭은 걸림돌이 된다는 것.
공장 A라인에서 일하던 근로자를 B라인으로 돌리면 호칭 체계
에선 형, 동생으로 ' 한 집안 식구'이던 사람이 '이방인'이 된다.
결국 근로자들은 부서 이동을 하고 싶 어하지 않거나 부서를 이
동한다고 해도 처음에는 적절한 호칭을 찾느라 통성명 단 계에
서부터 고생하는 일이 많다.
박 교수는 이러한 심적 부담이 노동유연성을 떨어뜨리고 생산적
인 구조조정을 어렵게 만드는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반면에 장기간 호칭 혁신을 해온 회사에선 이 같은 벽이 거의 없
다.
CJ 홍보팀의 배수정 씨는 "다른 회사에서 이직해온 인원 수는 회
사 기밀이라 공개 하긴 어렵다"며 "하지만 호칭이 직접적인 원인
일지는 몰라도 2000년 이후 놀랄 만 한 숫자가 CJ로 들어왔
다"고 말했다.
호칭 혁신이 이뤄진 회사는 초기 적응이 쉽기 때문에 빨리 들어
와 일할 수 있다는 얘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