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긋하게 즐기는 아·점 ‘브런치’ 시대

주말에 서울 청담동이나 이태원의 내로라하는 브런치(Brunch·아 침 겸 점심) 식당에 가보자. 며칠 전에 예약해야 하는 것은 필수 사항이다. 오전 11시에서 정오 사이에 젊은 여성들이 하나 둘씩 도착한다. 언뜻 보면 편안한 캐주얼 차림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귀고리와 구두 등 한껏 멋을 낸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왠지 이 대열에 끼려면 선글라스를 머리에 올려 쓰고 요즘 유행 이라는 자물쇠 달린 ‘끌로에’ 핸드백 한 개쯤은 예의상 들어줘야 할 것 같다. 식당 앞은 발레파킹 하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 다.   자리엔 팬케이크, 오믈렛, 와플 같은 아기자기한 메뉴들이 놓여 진다. 평소엔 땀 흘리며 운동해 체중관리를 하더라도 이날만큼 은 마음이 말하는 대로 따르자. 생크림을 듬뿍 얹은 디저트도 이 날만큼은 용납된다. 대신 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게 먹 어야 한다. 남자들은 “스테이크도 아니고 빵 조각 몇 개 먹으면 서 무슨 2만원씩이나 내느냐”고 할 일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어 차피 허기를 채우러 온 건 아니니까. ‘브런치’라는 또 하나의 ‘문 화’를 먹으러 온 것 아니었던가.   이야기 꽃을 피우는 사이 커피 잔은 끝도 없이 리필된다. 부서회 의도 없고 마감시간도 없으니 지금이 몇 시인지 체크할 일도 없 다. 맑고 밝은 분위기에서 왁자지껄 수다를 떨다보면 어느새 세 상의 걱정 시름은 사라져버린다. 요즘 이렇게 주말의 오후를 브 런치와 벗 삼아 보내는 여성이 많아지고 있다.   ‘브런치(Brunch)’는 아침식사(break fast)와 점심식사(lunch)의 합성어로, 아침 겸 점심식사를 뜻한다. 주말 오전에 늦게 일어나 여유를 부리다가 아·점(아침 겸 점심)으로 편안하게 먹는 식사 다. 주 5일 근무제가 자리를 잡고, 외국 생활을 통해 브런치를 접 해 본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브런치를 먹는 게 하나의 트렌드가 됐다.   2~3년 전부터 청담동이나 이태원 등지에서 브런치 메뉴를 선보 이는 식당이 늘어나더니, 지난해엔 브런치 전문식당을 표방한 곳들까지 생겼다. 가격대는 1만원~2만5000원 선이다. 독특한 점은 손님의 80~90%가 여성이란 것이다. 서울 신사동에 있는 ‘텔미 어바웃 잇’의 최은경 매니저는 “브런치 메뉴를 찾는 고객 의 100%가 20~30대 전문직 여성이라고 보면 된다”며 “남성 손 님이 오면 민망해할 정도로 여성 고객이 많다”고 했다. 평소 일 하느라 바빠서 약속도 잡기 어려운 커리어우먼들이 친구들과 기 분도 내고 수다도 떨기 위해 브런치 모임을 갖는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미국의 인기 시트콤 ‘섹스 앤 더 시티’ 속의 한 장면 과 다를 바 없다. 이 시트콤에선 섹스 칼럼니스트, 변호사, 갤러 리 큐레이터, 홍보업체 사장인 독신여성 4명이 일요일이면 뉴욕 의 분위기 좋은 카페들을 순례하며 브런치 수다를 떤다. 이태원 에 자리한 ‘르 생떽스’의 벵자멩 주아노 사장은 “ ‘브런치’라는 이름 자체는 영어권에서 생겨났지만 프랑스 등 유럽에서도 주말 이면 한가롭게 브런치를 먹는 게 밥 먹는 문화 중 하나”라며 “바 쁜 가운데 브런치를 하면서 여유를 느껴보려는 게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 트렌드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브런치가 일상의 풍속도로 자리 잡으면서 식당별로 주력 상품도 차별화되고 있다. 오믈렛이나 팬케이크를 기본으로 하는 미국식 이 있는가 하면, 영국풍이나 프랑스풍 등 식당별로 다양하다.   얼마 전 일요일 점심에 이태원의 ‘수지스’(Suji’s)에 가봤다. 미국 의 가정집 분위기가 난다더니 창문이며 벽에 걸린 액자 등 투박 하면서도 정겨운 느낌이 났다. 오후 1시가 좀 넘었는데 60여석 이 가득 찼다. 외국인 가족이나 남녀 커플로 온 사람이 서너 자 리를 채웠을 뿐 대부분 여성 손님이었다. “요즘 나 피부가 엉망 이라서” “바뀐 부서에선 일하기 어떠니?” “지난 주 소개팅은 애 프터 있었니?” 옆 자리에 앉은 여성 네 명이 정신없이 수다를 떨 고 있었다.   뉴욕 브런치(1만6000원), 멕시칸 브런치(1만5000원) 외에 튀긴 감자, 토스트와 함께 나오는 오믈렛, 블루베리와 생크림을 얹은 프렌치 토스트 등이 수지스의 인기 메뉴다.   수지스는 뉴욕에서 국제회의의 외신담당 홍보 일을 해온 박수지 (39)씨가 사장으로 있다. 그는 ‘격식을 너무 갖춘 식사 자리나 삼 겹살과 소주로 대변되는 술자리 외에 편안하고 느긋한 브런치 식당이 한국엔 없을까’ 하고 고민하다가 식당 문을 열게 됐다고 한다. 이곳이 인기를 모으면서 일본에 ‘수지스 도쿄’를 곧 오픈 할 계획이다.   이태원의 또 다른 브런치 명물로는 12년간 한국서 생활한 프랑 스인 벵자멩 주아노씨가 운영하는 ‘르 생떽스’(Le Saint-EX)가 있다. 6년 전 처음 문을 열었을 땐 손님의 대부분이 외국인이었 다. 그러다 3년 전쯤 브런치 메뉴를 선보인 뒤론 한국 손님이 많 아졌다.   평소엔 전체 손님의 50~ 60%가 한국인이지만 주말엔 80~90% 에 이른다. 주아노 사장은 “캐주얼하게 운동화를 신고 찾아오는 브런치 식당을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식당 안엔 프랑스 와인, 샴페인, 요리 등에 대한 책도 꽂혀 있다. 파리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식당 느낌이다.   수프, 메인, 디저트로 이어지는 브런치 세트(2만원)와 그린샐러 드, 달걀 프라이, 소시지, 베이컨, 토스트 등을 한 접시에 내놓는 브런치 플레이트(1만5000원)가 있다. 커스터드 크림 위에 달걀 흰자로 머랭을 만들어 구워내고 그 위에 아이스크림 같은 모양 으로 설탕 시럽을 끼얹은 플로팅 아이랜드가 이곳의 명물 디저 트다.   한남동의 ‘퍼핀 카페’도 8년째 인근에 사는 외국인이 많이 찾고 있는 브런치 식당이다. 이곳은 일요일엔 아예 예약을 받지 않는 다. 도착하는 대로 빈 자리가 있으면 앉을 수 있다. 브런치를 즐 기러 온 손님들을 빈 자리가 있는데도 예약이 차 있다는 이유로 돌려보내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토스트에 베이컨, 감자, 소시 지 등이 있는 컨츄리(9900원), 스페셜 샌드위치(8000원), 에그 샐러드 샌드위치(7000원) 등이 있다.   성신여대 앞 ‘마미 인 더 키친’(Mommy in the kitchen)도 1년반 전 브런치 식당으로 문을 열었다. 평일엔 교수와 학생이 많이 찾 지만 주말엔 여성 손님의 천국이 된다. 수프와 샐러드, 밥 등이 나오는 마미스 런치(7700원), 해산물 스튜풍의 요리인 마미스 팟 (2만9000원·2인분) 등이 있다. 마미 인 더 키친은 싸이월드에 홈 피를 개설, 손님들과 일촌을 맺고 의견을 받아 새로운 메뉴를 선 보이기도 한다.   이태원 등 강북에 비해 청담동 주변엔 브런치를 선보이는 식당 이 훨씬 많은 편이다. 샐러드, 구운 야채 등 10여가지 메뉴를 뷔 페식으로 골라 먹을 수 있도록 한 ‘비스트로 디’(Bistro d)의 브런 치도 입소문을 타고 있다. 비스트로 디는 ‘딤채’라는 김치냉장고 를 판매하는 위니아만도가 지난해 10월 문을 연 카페 겸 레스토 랑이다. 처음엔 1만5000원짜리 뷔페와 단품 메뉴 몇 가지를 브 런치 메뉴로 선보였지만 요즘은 주말이나 휴일용 브런치 메뉴를 2만5000원짜리 뷔페로 못 박았다. 뉴욕에서 요리를 배운 요리 칼럼니스트인 박현정씨가 편안하고 심플한 뉴욕 식당의 느낌을 최대한 살려 만들었다. 비스트로 디의 홍성민 지배인은 “지난해 말부터 청담동 일대에선 브런치를 먹는 게 유행으로 자리잡았 다”며 “주말이면 한 테이블당 평균 세 번 정도 손님이 바뀔 정도 로 인기”라고 했다.   신사동에 있는 브런치 식당 ‘스토브’(Stove)는 식당 이름대로, 난로처럼 편안한 집 분위기가 나는 곳이다. 주말이면 팬 케이크, 오믈렛, 요구르트, 시리얼 등 스무 가지 정도의 음식을 뷔페식으 로 먹는 ‘샐러드 뷔페(1만9000원)’가 나온다. 영업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다. 스토브의 김현 부사장은 “브런치는 후닥닥 밥을 먹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며 “즐기고 느끼는 다분 히 여성적인 문화”라고 했다. 이곳엔 실제로 오후 1~2시경 식당 을 찾아 오후 5시까지 밥 먹고 차를 마시며 자리를 뜨지 않는 여 성 손님이 많다고 한다. 스토브는 브런치 메뉴가 인기를 모으자 평일에도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 ‘쁘띠 브런치’(1만2000 원)를 내놓기 시작했다. 오믈렛이나 팬 케이크 중 하나를 메인으 로 고른 뒤 샐러드와 수프만 뷔페식으로 골라먹는 방식이다.   신사동의 ‘텔미 어바웃 잇’(Tell me about it)은 주말에 테라스 쪽 에 앉기 위해선 일주일 전에 예약을 해야 하는 인기 식당이다. 전체 매출액 중 브런치 메뉴의 비율이 40%를 넘는다고 알려져 있다. 칵테일에 이어 캐비어를 얹은 스크램블이 나오는 ‘미모사 브런치’ 등 네 가지의 브런치 메뉴가 준비돼 있다. ‘행 오버?’(숙 취 해소가 필요하세요?) 메뉴를 고르면 아스피린 한 개를 함께 내준다. ‘미식가를 위하여’(2만2000원)라는 브런치 메뉴는 평일 에도 선보이고 있다.   이곳의 최은경 대리는 “계절에 따라 2~3개월에 한 번씩 메뉴에 변화를 주고 카드를 발급 받은 고객을 위한 사은파티도 열고 있 다”고 했다.   이 밖에도 청담동, 방배동 등 강남 지역에선 ‘카페 74’ ‘비손’ ‘라 트루바이’ ‘카페 greEAT’ 등이 브런치 식당으로 이름 나 있다.   싸이월드에 ‘주말 브런치 즐기기’라는 동호회를 만든 김향희(27· 광고대행사 직원)씨는 “주 5일 근무와 여유로운 식사가 여성의 감수성과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 브런치가 인기를 모으는 것 같 다”고 했다. 한 달에 한 번씩 회원들끼리 브런치를 하며 정기 모 임을 갖는다는 그는 “앞으론 테라스가 있는 브런치 식당이 더 많 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했다.